
매년 3월 27일은 ‘세계 연극의 날(World Theatre Day)’이다.
1961년 국제연극협회(International Theatre Institute, ITI)가 제정한 이 날은, 연극이라는 예술 형식을 통해 인류가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고 삶의 본질을 성찰해 나가는 그 모든 과정을 기념하고자 만들어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무대 위에 서고, 또 누군가는 객석에서 호흡하며 삶의 조각을 보고 있다. 이 특별한 날, 우리는 연극의 의미를 다시 되짚어보고,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공연예술이 어떻게 새롭게 존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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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의 본질은 여전히 사람이다
연극은 영상도, 음향도, 편집도 없는 예술이다. 오직 사람과 사람, 그리고 공간과 시간만 존재한다. 한 사람이 누군가가 되고, 다른 이가 그 이야기를 듣고, 감정이 오가는 바로 그 장면. 연극은 대본이 아니라 ‘현재’로 완성되는 예술이다.
무대는 언제나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이들의 거울이었다.
왕의 이야기이든, 소시민의 이야기이든, 슬픔이든 웃음이든 간에 결국 연극은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을 건드린다. 그것이 연극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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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 속 연극의 자리
OTT, 숏폼 영상, AI 콘텐츠까지. 이제 사람들은 몇 초 안에 자극을 받고, 다음 영상으로 넘어간다. 극장에서 두 시간 가까이 무언가를 바라본다는 건 어쩌면 시대의 흐름에 거스르는 행위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은 여전히 공연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래서' 연극이 공연된다.
디지털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진짜 사람의 호흡'을 그리워한다. 편집되지 않은 표정, 예측할 수 없는 생생함, 실수조차 아름다운 장면. 연극은 인간다움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매체다.
최근엔 연극과 테크놀로지가 결합된 실험들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가상현실(VR), 실시간 스트리밍 공연, 다큐멘터리형 연극 등은 관객과 무대 사이의 새로운 연결을 시도한다. 연극은 변하고 있지만, 본질은 여전히 그대로다. 관객 앞에 서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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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주는 사회적 가치
연극은 단지 오락이나 예술 활동에 머물지 않는다.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시대의 병리적 현상을 비추며, 때론 혁명을 촉진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독일의 브레히트가 그랬고, 한국의 연우무대나 극단 백수광부가 그랬다. 광장의 언어가 통제될 때, 사람들은 무대 위의 언어로 진실을 전했다.
특히 지역 사회와 학교, 병원, 교정시설 등에서 진행되는 공동체 기반 연극 활동은 연극의 사회적 확장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연극은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목소리를 주고, 갈등을 대화로 바꾸며, 단절된 관계를 다시 연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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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연극을 본다는 것
요즘 누군가에게 연극은 '특별한 날의 선택'일 수도 있다. 연극을 보는 것은 어느새 '문화생활을 한다'는 느낌이 되었고, 약간의 시간과 계획이 필요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그 수고를 무릅쓸 만한 가치가 있는 경험이라는 점에서, 연극은 여전히 유일하다.
작은 극장에서 50명의 관객과 호흡을 나누는 경험. 배우의 한숨, 눈물, 외침이 내게 직접 다가오는 그 밀도. 그건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감각이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무대 위의 인물과 다르지 않다. 똑같이 사랑하고, 상처받고, 선택하고, 후회하는 존재. 그래서 연극은 관람이 아니라 공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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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질문이 살아있는 무대
세계 연극의 날에는 매년 전 세계 예술가가 릴레이로 '메시지'를 남긴다.
2024년 메시지를 맡았던 이집트의 연출가 나빌 엘라리는 이렇게 썼다.
“연극은 삶을 보존하는 행위다. 그것은 인간의 꿈, 두려움, 가능성을 담고 있다.”
우리는 연극을 통해 질문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선택하는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이 질문은 어느 시대에나 유효하며, 어느 무대에서나 던져질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질문이야말로, 디지털의 바다에 잠겨가는 지금 우리에게 연극이 다시 필요한 이유다.
3월 27일, 오늘 하루만큼은 삶과 예술이 맞닿은 그 공간, 무대를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우리가 여전히 사람이라는 증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