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 3일, 제주에서는 매년 조용한 의식이 치러진다.
사람들은 검은 정장을 입고,
붉은 동백꽃을 들고,
어떤 이름은 불리고,
어떤 이름은 여전히 불리지 못한 채 바람 속에 흩어진다.
제주 4·3 희생자 추념일.
오늘은 단지 ‘하나의 사건’을 기억하는 날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한 번쯤 마주해야 할
‘기억의 윤리’를 되묻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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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은 무엇이었나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제주 북국민학교 앞 3·1절 기념식장에서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이 희생되며 긴장의 불씨가 시작됐다.
그리고 1948년 4월 3일 새벽,
무장대가 남로당의 지시 아래 제주 전역의 경찰지서 등을 습격하며 본격적인 충돌이 시작되었다.
이후 무장대 토벌이라는 명분 아래
국가권력과 군경, 서북청년단 등이 제주 민간인들을 대거 학살하는 비극으로 이어졌고,
그 불길은 1954년까지 7년 동안 이어졌다.
희생자는 수만 명.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무기를 들지 않았던 이들,
그저 ‘그곳에 살고 있었다는 이유’로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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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보다 앞선 것은 인간이었다
제주 4·3을 이야기하면,
종종 ‘좌익-우익’, ‘빨갱이-토벌대’라는 단어들이 먼저 소환된다.
하지만 정작, 그 이념의 언어 속에 빠져버린 건
‘사람’이었다.
누가 총을 들었고, 누가 명령했는지는
기록으로 규명될 수 있다.
하지만 한 아이가 어머니를 잃고,
한 마을이 사라지고,
어떤 이는 평생 “그날”을 말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는 사실은 단지 역사책으로 남을 수 없다.
이념보다 앞선 것은 ‘삶’이었고,
먼저 망가진 것은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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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게 시작된 사과
제주 4·3 사건은 오랜 시간 금기였다.
말하지 말아야 할 것, 묻어야 할 것, 피해야 할 것.
심지어 가족 중 누군가 희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이 따라붙었고,
그것은 입학, 취업, 결혼,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수십 년 동안 차별과 침묵을 강요했다.
그 첫 공식 사과는
2003년,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2021년, 문재인 정부 시기엔 4·3 특별법이 전면 개정되며 희생자 명예 회복과 배·보상 근거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어떤 유족은 말했다.
“지금 사과를 받아도, 나는 엄마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요.”
그래서 이 사과는
‘이제야 시작된 사과’ 일뿐,
완결이 아니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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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동백꽃, 슬픔을 품다
제주에서는
4월이 되면 동백꽃이 진다.
바람에 떨어진 붉은 꽃잎은
흙 위에 고요히 엎드려 있다.
제주 4·3의 상징이 동백꽃인 이유다.
피어있는 것보다,
‘떨어진 것’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닮았기 때문이다.
동백꽃은 제주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한 이름이었고,
꺼내지 못한 기억이었고,
그럼에도 계속 살아내야 했던 삶의 무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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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기억할 수 있을까
제주 4·3은 이제 ‘기억의 영역’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이 박제된 기록이 아닌
지속적인 사유의 형태로 우리와 함께 하려면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추념식에 참여하지 않아도,
제주에 가지 않아도,
유족이 아니어도,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내가 그 시절 그 자리에 있었다면?"
"지금 우리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들이야말로
기억을 정치와 이념이 아닌,
공감과 책임의 언어로 바꾸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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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제주를 바라보며
오늘도 제주에는 바람이 분다.
예전과 다르지 않은 하늘 아래,
동백나무가 선 그 자리에서,
어떤 이름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 알 수는 없지만,
다시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기억할 수 있다.
4월 3일.
추념일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이 날.
우리는 그날을 ‘과거의 사건’으로 묻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나와 연결된 이야기로 꺼내놓아야 한다.
기억은 때로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이 공동체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그 아픔을 함께 품을 수 있어야 한다.